vol.20 2020. 10

강원도의회 정책Letter

정책제언

사람 앞에 붙은 '이름표' 를 떼는 일, 인권의 시작이자 전부이다.

기고자원은정한국청소년센터 대표

한국청소년센터 대표 원은정

쾅쾅쾅 -
1958년 미항공우주국 NASA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쾅쾅쾅. 쇠로 쇠를 두드리는, 무언가를 때리고 부수고 떼어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울리는 소리다. 이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은 천재적인 숫자 계산 능력으로 전산원으로 입사한다. 물론 흑인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임시직이다. 흑인 여성 전용 화장실은 그녀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800m 떨어진 건물 지하에 있다. 그녀의 백인 본부장은 그 사실을 알고 ‘흑인 여성 전용 화장실’ 안내판을 떼어내고 있다. 쾅쾅쾅

올해 2월, 오랜 꿈이었던 쿠바 여행을 드디어 가게 됐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면서 확인한 코로나 확진자 수는 34명, 긴 비행과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쿠바에서 잠깐씩 인터넷 접속해서 확인한 코로나 확진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쿠바 여행 10일 째에 34명이었던 확진자가 3000명이 되었다. 그제야 우리 여행 멤버들은 알아차렸다. 바라데로는 각국의 사람들이 모이는데, 특히 유럽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여행객 중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는 유심히 쳐다봤고 결코 그 눈길을 거두지 않았으며 자기네들끼리 귓속말을 했다. ‘동양인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보다’ 라고 짐작하고 있던 우리들은 중국과 한국에서 코로나 확진자 수가 팽창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서야 그들의 눈빛이 차가웠던 이유를 안 것이다. 우리가 앉는 자리 근처를 인상을 쓰며 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 이들은 우리를 ‘코로나’로 보고 있구나.' 다음날, 그들의 눈빛은 더 차갑고, 경계했으며 날이 서 있었다. 눈길을 전혀 거두지 않으면서 귓속말 하는 모습은 우리가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되는 존재로 느껴지게 했다.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느낌이라는 것. 온통 있으면 안되는 자리들 투성이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기가 어렵고 걸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감성이라는 말이 있고, 감수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감성은 나와 내 감정의 관계를 말한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면, 감수성은 나와 타인의 감정과의 관계를 말한다. 타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짐작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까지 하면 이것이 소통이다. 만약, 지하철 계단을 뛰어가다가 넘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아, 아프겠다.’ 그리고 ‘아, 사람이 많아서 창피하겠다.’ 이 감정을 짐작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이 시점에서 2차 가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창피해할 수 있다는 짐작을 하지 못하면, 큰 소리로 “여기 보세요. 여기에 사람이 넘어졌어요. 계단에서 글쎄 쿵 하고 넘어졌지 뭐예요. 와 진짜 내가 다 놀랐네.”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의 창피함을 더 배가시키는 일을 하고야 만다. 아마도 그 사람은 너무 창피한 나머지 자신이 아픈 것을 추릴 세도 없이 자리를 뜨려고 하거나, 피가 나도 닦는 것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인권 감수성의 핵심은, 그 사람의 입장까지 되어볼 순 없지만(우리는 절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다. 설사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 입장을 ‘한 사람으로서’ 짐작해보는 것이다. 이 사회는 사람에게 수많은 이름을 붙이고 분류한다. 사람보다 그 분류 이름표가 더 중요해 보인다. 흑인, 동양인, 여성,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 미혼모 등등…

이러한 무수한 이름표를 넘어가 사람과 사람으로 접촉해서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감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이 겪는 일을 내가 겪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많은 것이 바뀐다. 그 사람이 그동안 경험한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그 사람의 신념과 공포증 이러한 모든 것들까지 알 순 없지만 ‘나라면’ 이라는 단순한 이입만 해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상황만을 놓고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감수성이라는 단어는 더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차별과 혐오 그리고 배제는 타인을 밀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결국 이 사회를 붕괴시키고 있다. 얼마 전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라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자유 사회에서 일어나는 순식간의 분열과 혐오를 말이다. 흑인들이 겪은 차별의 역사를 우리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이 죽는 일까지 일어난다는 것이 그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흑인들을 향한 차별은 다시 동양인에 대한 차별로까지 이어지면서 차별은 차별을 낳고, 혐오는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차별을 받은 사람의 분노가 또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형태로 발산되어서는 이 악순환이 멈춰질 수 없다. 곳곳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그것을 멈춰야 하고 멈출 수 있다. 바로 ‘이름표’를 떼는 것.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화장실 앞에 붙어있던 ‘흑인 여성’, ‘백인 여성’, ‘흑인 남성’, ‘백인 남성’의 이름표를 떼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화장실 그 본질만 남는다. 사람 앞에 붙어 있는 수많은 이름표를 떼어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사람’. 오직 사람이라는 것만이 우리가 봐야할 본질이다. 만약, 조지 플로이드를 경찰이 흑인이나 범죄자라는 이름표로 보지 않았다면, 오직 사람으로 봤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동양인을 코로나로 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벤치에 우리는 기꺼이 앉아 친구가 되는 기회를 맞았을 것이다. 그대 안에 사람을 향한 이름표가 있다면 먼저 할일은 ‘쾅쾅쾅’. 이름표를 떼는 일이다.

  • 출처: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 무지개광장 NEWS LETTER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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